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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고 하는 타이틀과 명칭을 최고로 내세우는 서양 경전 코란이 표방하는 것은 구전되는 계시이다. 문자로 위탁되었을 경우 그것은 오로지 암송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주시하자. (사실 '코란'이라는 말은 암송을 의미한다.) 그렇게 위탁된 언어의 절대성은 듣고 적어 내려간 목소리의 절대성과 다르지 않다.
사실 책에 대한 관념은 그 자체로 절대성, 완결성의 관념이다. 따라서 개개의 책은 경전만이 세상의 유일한 책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반대로 스스로를 성스러움의 연마exercice de sainteté 과정이라고 여긴다. 이때의 성스러움은 의미sens 부여의 가능성을 무분별하게 찾는 일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매 순간, 두루마리 책에서, 제본된 책자에서 의미의 광채가 빛을 발하고 또 사그라진다. 그렇게 점점 더 멀리, 책에서 책으로, 타 비블리아ta biblia*는 이편에서 저편으로 무한히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매번 유일한 것이 된다. *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또한 책은 단순히 소통의 수단도, 소통을 표현하는 매체도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책은 중간매체가 아니다. 그 자체로 즉각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자 거래[교제]commerce**이다. **고어에서 혹은 문학 담론에서 '교제, 교류'를 뜻한다. 낭시는 이 단어가 지닌 이중적 의미를 글 전체에 걸쳐 사용한다. 실제로 책을 읽는 사람은 거래 속으로 들어갈 뿐,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책은 메시지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풍자문'이나 '논문'과 확연히 구분된다. 감히 말하자면 책은 스스로 직접 나서서 자신과의 소통에 가담하기 때문이다.
책은 그 궁극적 목표를 이미 자신 안에 마련해놓고 내면을 꽁꽁 감싸 안은 봉투처럼 운신한다. 일체성과 단일성이 내부에 담겨있기에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의 '영혼'을 꺼내 보여주기가 불가능한 것과 같다. 일체성과 단일성이 내포되어 있는 정도가 어찌나 확실하고 강력한지 그것을 풀어내는 일은 논외로 치부되기 때문에 그 끝을 알 수 없다.(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책의 열림과 닫힘은 안쪽이 끊임없이 바깥쪽을 지향하는 지형처럼 드러난다. 모든 책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그 자체로 보면, 책은 끝이 난 것이면서도 끝이 없는 것이고, 어느 면에서 보아도 비결정적으로 완결된 것이다. 매번의 책장에서는 새로운 여백이 열린다. 하나하나의 여백은 점점 넓어져 보다 많은 의미와 비밀을 품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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